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벌새 (침묵 속 성장, 인물의 파편, 세계가 감동한 시선)

by Luma 2025. 6. 7.

벌새 이미지

침묵 속 성장 – 사소한 순간이 전부였던 시절

〈벌새〉는 2019년 김보라 감독이 연출한 장편 데뷔작으로, 1994년 성수대교 붕괴라는 시대적 사건을 배경으로 한 소녀의 감정과 성장의 흐름을 담담하게 포착한 영화다. 처음에는 미시적인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영지(박지후)의 일상을 따라가다 보면, 이 영화가 세상과 사람, 가족, 상실, 그리고 여성이라는 존재를 얼마나 섬세하고 깊이 있게 풀어내고 있는지 체감하게 된다. 이야기의 중심에는 중학생 ‘은희’가 있다. 은희는 가족 안에서는 투명인간처럼 느껴지고, 학교에서도 어디에도 딱히 소속되지 못한 채 존재하는 인물이다. 가족은 무심하고 폭력적이며, 친구들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살아간다. 은희는 병원을 들락거리며 혹을 제거해야 하고, 연애라고 부르기엔 미숙한 감정의 흔들림을 겪으며, 늘 뭔가를 기다리지만 쉽게 얻지 못한다. 영화의 핵심은 극적인 사건보다도, 일상 속에서 느껴지는 감정의 결을 따라간다는 점이다. 김보라 감독은 은희가 겪는 작은 변화들—친구와의 오해, 언니의 폭력, 엄마의 무관심, 선생님과의 짧은 만남—을 통해 인물의 내면을 천천히, 그러나 뚜렷하게 드러낸다. 영화의 리듬은 마치 은희의 시선과 호흡을 따라가듯 느리지만, 그 속에 있는 감정은 매우 강렬하다. 1994년 성수대교 붕괴는 영화의 전면에 등장하지 않지만, 그것은 배경 그 자체로서 은희의 내면적 충격을 상징한다. 사람들은 무너지고, 삶은 예고 없이 균열된다. 은희 역시 이 시기를 지나며 자신도 모르게 무너지고, 동시에 스스로를 세워나간다. 성장이라는 단어가 폭발이 아니라 침묵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이 영화는 조용히 말해준다.

인물의 파편 – 누구도 완전하지 않았던 관계들

〈벌새〉의 인물들은 모두 조금씩 결함을 지니고 있다. 은희의 부모는 삶에 지쳐있고, 그 피로가 아이들에게로 전달된다. 아버지는 권위적이며 가부장적인 태도를 지녔고, 어머니는 그 틀 안에서 감정을 억누른다. 언니는 그 억압을 동생에게 전가하며 폭력을 휘두른다. 하지만 이 영화는 누구도 명확히 악인으로 그리지 않는다. 이들은 다만 각자의 방식으로 고통받는 사람들이며, 은희는 그 가운데서 홀로 자라난다. 가장 인상 깊은 인물은 은희의 한문 선생님 ‘영지’(김새벽)이다. 그녀는 은희의 삶에 처음으로 등장한 ‘관심을 가진 어른’이다. 영지는 조용히 은희를 관찰하고,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준다. 단 한 번의 따뜻한 시선과 말 한마디로, 영지는 은희의 삶 전체를 바꾸는 인물로 작용한다. 하지만 그런 영지도 암으로 세상을 떠나며, 은희에게 또 하나의 상실을 안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짧은 관계는 은희에게 자아를 세우는 기반이 된다.

은희와 친구 ‘지숙’의 관계는 사춘기의 전형적인 감정선이지만, 영화는 그것을 진부하게 다루지 않는다. 그들의 갈등과 화해, 질투와 의리는 성장기의 인간관계가 얼마나 불안정하고 소중한지를 보여준다. 은희의 전 애인 ‘지완’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애정은 있었지만 어색했고, 그 어색함이 또 하나의 상처로 남는다. 이 모든 인물은 은희에게 영향을 주지만, 궁극적으로 은희는 스스로 성장한다. 타인에 의해 상처받지만, 동시에 그 속에서 스스로를 찾아가며 ‘살아남는다’. 영화는 그 성장의 과정을 무겁게 혹은 비극적으로 표현하지 않고, 그저 담담한 현실로 그려냄으로써 오히려 깊은 울림을 준다.

세계가 감동한 시선 – 한국 독립영화의 새로운 지평

〈벌새〉는 국내보다 해외에서 먼저 주목받았다. 베를린국제영화제, 트라이베카영화제, 부산국제영화제를 비롯해 세계 60여 개 영화제에서 상영되었고, 무려 30개 이상의 상을 휩쓸며 김보라 감독의 이름을 세계에 알렸다. 미국 IndieWire, 영국 Guardian, 프랑스 Les Inrockuptibles 등 주요 매체에서도 이 작품은 “숨이 막힐 정도로 섬세하고 아름다운 성장 영화”라 평가되었다. 가장 높이 평가된 부분은 ‘시선’이었다. 이 영화는 소녀의 시선을 통해 세상을 바라본다. 어른의 세계는 모두 배경이 되며, 중심은 오롯이 은희에게 있다. 이는 한국 영화에서 드문 시도였고, 특히 여성 청소년의 감정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태도는 많은 해외 비평가들에게 신선하게 다가왔다. 또한 이 작품은 과장되지 않은 연출과 절제된 대사, 자연광과 로우 앵글 카메라를 통해 은희의 내면을 시각적으로 섬세하게 드러낸다. 봉준호 감독은 “한 장면, 한 장면이 고요한 파도처럼 밀려오는 영화”라고 말하며 〈벌새〉를 극찬한 바 있다. 〈벌새〉는 영화의 배경인 1994년을 통해 단지 한 사람의 성장뿐 아니라, 한 시대의 감정을 포착한다. 사회는 빠르게 변했고, 다리도 무너졌으며, 사람들은 균열 속에서 살아갔다. 그 시절을 살아낸 은희의 눈을 통해 관객은 자신이 놓쳤던 감정을 되짚게 된다. 이 영화는 잊고 있던 감각을 되살리는 작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