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년 개봉한 영국 영화 <씨 하우 데이 런(See How They Run)>은 클래식 추리극의 전통을 재치 있게 비틀며 새롭게 재해석한 블랙코미디 추리 영화입니다. 아가사 크리스티의 대표작 <쥐덫(The Mousetrap)>의 무대 공연 100회를 기념하는 행사 도중 벌어진 살인 사건을 중심으로, 고전 추리의 틀을 따르면서도 세련되고 유머러스하게 전개되는 이 작품은 추리물 팬은 물론 영화 팬들에게도 신선한 재미를 선사합니다. 이 글에서는 <씨 하우 데이 런>의 줄거리, 주요 캐릭터, 영화 속 영화 구조, 그리고 영국식 유머가 만들어내는 독특한 매력을 집중 조명해 보겠습니다.
1950년대 런던, 연극 무대 위에서 벌어진 진짜 살인사건
<씨 하우 데이 런>의 배경은 1953년 런던의 웨스트엔드, 아가사 크리스티의 전설적인 추리극 <쥐덫>의 무대 위입니다. 이 작품은 무대극 100회를 맞이하며 영화화 논의가 한창인 상황에서, 제작자이자 감독으로 참여한 레오 코페른틱(에이드리언 브로디)이 백스테이지에서 살해당하면서 본격적인 미스터리가 시작됩니다. 피해자인 레오는 할리우드 출신 감독으로, 웨스트엔드의 고전적인 분위기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인물입니다. 그는 무례하고 자기중심적이며, 극 중 인물 모두와 갈등을 빚고 있던 인물로, 자연스럽게 용의자로 지목될 수 있는 인물들이 넘쳐나죠. 그로 인해 <씨 하우 데이 런>은 클로즈드 서클(Closed Circle) 형식의 정통 추리극 양식을 따르게 됩니다. 수사는 런던 경찰의 스토퍼드 경감(샘 록웰)과 신입 여성 경찰 콘스터블 스토커(시얼샤 로넌)에 의해 진행됩니다. 이 두 인물은 서로 상반된 성격을 가진 ‘버디 형사’ 콤비로, 기존 추리물에서 보기 어려운 색다른 유쾌함을 만들어냅니다. 경감은 냉소적이고 무기력한 반면, 스토커는 열정적이고 순수한 수사 초짜입니다. 두 사람의 케미는 사건의 긴장감을 무겁지 않게 풀어내는 데 큰 기여를 합니다. <씨 하우 데이 런>의 강점은, 살인사건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미스터리의 틀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메타적인 유머와 자기 패러디를 끊임없이 사용하여 관객의 몰입도를 높인다는 점입니다. 영화 자체가 추리극에 대한 ‘풍자극’이자 ‘헌정’으로 기능하면서도, 실제로는 짜임새 있는 미스터리로도 기능하는 점에서 높은 평가를 받았습니다.
클래식 추리극에 대한 메타적 재치와 영화 속 영화 구조
이 영화의 가장 독창적인 특징은 바로 영화 속 영화 구조와 메타픽션적 연출입니다. <쥐덫>이라는 실존하는 연극을 배경으로 삼은 이 영화는, 그 연극의 영화화를 추진하던 인물이 살해되면서 벌어지는 현실과 극의 경계를 흐리는 방식을 취합니다. 영화 초반부터 피살자 레오의 내레이션을 통해 “추리물은 언제나 똑같다”라고 비꼬는 대사들이 등장하면서, 관객들에게 기존 공식이 아닌 전개를 암시합니다. 이 메타적인 시선은 사건이 전개될수록 더욱 강해집니다. 영화는 추리극에서 흔히 등장하는 캐릭터 유형들—예를 들어, 숨겨진 과거를 가진 작가, 비밀을 간직한 제작자, 냉소적인 주인공, 감정에 휘둘리는 신참 형사 등—을 그대로 배치하면서도, 그 인물들의 행동을 통해 추리물의 클리셰를 해체하거나 조롱합니다. 가령, 범인을 찾기 위해 모든 용의자를 한 장소에 모아놓고 ‘범인 발표’를 하는 고전적 클라이맥스 장면조차도, 이 영화에서는 엉뚱하게 진행되거나, 예상치 못한 반전을 통해 전복됩니다. 이러한 메타 요소는 단지 장난이나 풍자가 아니라, 추리 장르에 대한 애정 어린 시선에서 비롯됩니다. 감독 톰 조지는 이 작품을 통해 “우리가 너무 익숙한 장르를 어떻게 신선하게 풀어낼 수 있는가”를 실험하면서도, 추리영화 팬들에게는 반가운 오마주와 디테일을 아낌없이 제공하고 있습니다. 특히 실제로 <쥐덫>은 관객의 요청에 따라 ‘결말을 말하지 말라’는 약속으로 유명한 연극이기에, 그 연극 안에서 벌어지는 살인과 실제 수사를 교차 편집하면서, 허구와 현실의 경계를 자연스럽게 무너뜨리는 연출은 관객에게 깊은 몰입을 유도합니다.
시얼샤 로넌의 발견, 영국식 유머의 진수
<씨 하우 데이 런>은 뛰어난 미스터리 구성 외에도 배우들의 연기와 대사 중심의 영국식 유머가 돋보이는 작품입니다. 특히 시얼샤 로넌이 연기한 ‘스토커’ 캐릭터는 이 영화의 중심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스토커는 매우 순수하고 직선적인 경찰로, 수사에 임할 때마다 너무 빨리 결론을 내리거나 무의식적으로 용의자들에게 압박을 가하는 등 다소 엉뚱하지만 진심 어린 모습을 보입니다. 시얼샤 로넌 특유의 진중함과 개그 타이밍이 만나면서, 추리극이라는 장르가 갖는 무거움을 적절히 중화시키며 블랙코미디적 매력을 강화합니다. 또한 샘 록웰은 느릿한 말투와 무기력한 태도를 통해 고전 탐정 캐릭터에 대한 풍자적 묘사를 보여주며, 두 사람의 콤비 플레이는 <셜록>의 셜록-왓슨, <나이브스 아웃>의 브누아 블랑-도날드 같은 추리 듀오와 차별화된 새로운 매력을 발산합니다. 이 영화의 유머는 단순히 웃기기 위한 설정이 아니라, 대사와 상황의 어긋남에서 비롯된 영국식 아이러니와 냉소가 녹아 있는 것이 특징입니다. “분명히 범인이 누구든지, 범죄 동기는 무대 밖이 아니라 무대 안에 있다”는 식의 대사처럼, 추리물에 익숙한 관객일수록 피식 웃게 되는 장면이 많습니다. 또한 연극계를 둘러싼 풍자—배우들의 자의식, 제작자의 욕심, 평론가의 위선 등—이 영화 속 인물들에 고스란히 투영되며, 문화계 전반에 대한 날카로운 비판적 시선까지 담고 있습니다. 덕분에 이 영화는 단순한 장르물이 아니라, 문학적·문화적 해석의 여지도 많은 작품으로 자리매김하고 있습니다. <씨 하우 데이 런>은 고전 추리극의 형식을 충실히 따르면서도, 현대적 감각의 유머와 메타적 구성으로 장르를 새롭게 해석한 수작입니다. 치밀한 이야기 구조, 뛰어난 연기, 연극과 영화의 경계를 넘나드는 연출, 그리고 유쾌한 블랙코미디가 어우러지며, 관객에게 깊은 몰입과 신선한 재미를 동시에 제공합니다. 기존의 추리물을 좋아하셨다면 물론이고, 새로운 방식의 서사를 경험하고 싶은 분들에게도 강력히 추천드리는 작품입니다. 1950년대 런던, 무대 뒤 진실을 파헤치는 유쾌한 추리극 <씨 하우 데이 런>으로 다시 한번 클래식의 매력을 느껴보시길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