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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가씨 (비틀린 설계, 드러나는 정체, 세계가 주목한 감각)

by Luma 2025. 6. 6.

아가씨 이미지

* 비틀린 설계 – 그들은 서로를 속였다

〈아가씨〉는 박찬욱 감독이 2016년 연출한 영화로, 영국 작가 세라 워터스의 소설 『핑거스미스』를 조선 시대 말기와 일제강점기 조선을 배경으로 재창조한 작품이다. 이 영화는 단순한 로맨스나 범죄극의 외피를 쓰고 있지만, 실제로는 계급과 성, 권력과 욕망이 뒤엉킨 심리 서스펜스이자, 인간관계의 본질에 대한 탐구다. 이야기는 ‘숙희’(김태리)가 부잣집 아가씨 ‘히데코’(김민희)의 하녀로 들어가면서 시작된다. 숙희는 사실 사기꾼 일당의 일원으로, 후지와라 백작(하정우)과 함께 히데코를 속여 결혼시킨 후 정신병원에 가두고 재산을 갈취할 계획을 세운다. 처음엔 단순한 공모였던 이 사건은, 두 여성이 서로에게 점점 감정을 느끼게 되며 예기치 못한 전개로 향한다. 히데코 또한 비밀을 숨기고 있다. 그녀는 삼촌 ‘코우즈키’(조진웅)의 저택에서 일본 고서 낭독을 하며 지내지만, 실상은 남성 고객을 위한 외설적인 낭독회를 강요받는 삶을 살아왔다. 영화는 이 여성들의 닮은 듯 다른 과거와 고통을 교차시키며, 단순한 피해자-가해자의 관계를 벗어나 복잡한 심리적 결합을 만들어낸다. 〈아가씨〉는 총 세 개의 챕터로 구성되며, 각 파트마다 시점과 정보가 달라지면서 관객의 시선과 해석이 완전히 뒤바뀐다. 이는 박찬욱 감독 특유의 서사 구조로, 영화 중반을 넘어가며 밝혀지는 진실들은 충격 그 자체이며, 기존의 플롯을 완전히 다시 생각하게 만든다.

* 드러나는 정체 – 권력과 성, 그리고 선택의 힘

김민희가 연기한 히데코는 겉보기엔 나약하고 순종적인 아가씨지만, 실상은 오랜 시간 착취당한 피해자이며 동시에 강인한 생존자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삼촌에게 감금되어 왜곡된 성교육과 학대를 받아왔으며, 그런 현실에서 탈출하고자 끊임없이 시도한다. 김민희는 이 복잡한 캐릭터를 절제된 감정과 눈빛 하나로 표현하며, 억압된 인물이 가진 폭발력을 정확히 보여준다. 김태리의 숙희는 정반대의 결을 지닌 인물이다. 거칠고 욕심 많지만, 순수한 감정에 솔직한 인물로 그려진다. 처음에는 돈을 노리고 히데코에게 접근했지만, 그녀의 진짜 모습을 알게 되며 자신 역시 흔들리기 시작한다. 김태리는 데뷔작임에도 불구하고 인물의 성장과 감정의 미묘한 변화를 탁월하게 표현해내며 신인답지 않은 존재감을 보였다. 하정우가 연기한 후지와라 백작은 당대 남성 권력의 전형이다. 그는 허세와 교양을 무기로 삼지만, 결국 욕망에 의해 파멸한다. 조진웅의 코우즈키 역시 여성의 육체를 예술로 포장해 착취하는 가해자의 상징이며, 두 남성 인물은 각기 다른 방식으로 파멸해간다. 이들은 단순한 악역이 아니라, 구조적 폭력의 얼굴이다. 이 영화에서 중요한 건 단지 인물의 변화가 아니다. 두 여성의 연대는 단순한 사랑의 감정을 넘어, 억압된 시대와 환경 속에서 ‘자신의 목소리’를 찾는 과정이다. 히데코는 더 이상 독백하지 않으며, 숙희는 주어진 역할을 연기하지 않는다. 이들의 결말은 로맨틱하지만, 동시에 정치적이다.

* 세계가 주목한 감각 – 에로티시즘과 해방의 미학

〈아가씨〉는 칸 영화제 경쟁 부문에 진출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주목할 만한 시선’ 부문에서 감독상을 수상하며 세계적 호평을 받았다. 특히 유럽과 북미 비평가들은 영화의 과감한 연출, 미장센, 그리고 성의 표현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기존의 남성 중심 시선을 전복하고 여성의 욕망과 연대를 중심으로 서사를 재구성한 점이 높이 평가되었다. IndieWire는 이 작품을 “시각적으로는 눈부시고, 내러티브적으로는 대담한 구조의 걸작”이라 칭하며, 박찬욱 감독의 연출력과 여성 캐릭터의 주체성을 강조했다. New York Times는 "에로틱하면서도 자유로운 페미니즘 판타지"라고 평하며, 단지 자극적인 영화가 아닌 문화적 저항의 언어라고 분석했다. 일본과 아시아권에서는 영화의 배경이 된 일제강점기 설정과 일본어 대사 사용에 대해 다양한 반응이 있었지만, 대체로 "역사적 맥락 속에서 이루어진 상징적 재구성"이라는 긍정적 평가가 많았다. 특히 한일의 민감한 역사 사이에서도 영화가 인간 본성과 심리에 집중했다는 점에서 작품성 위주의 평가가 이어졌다. 국내에서는 청소년 관람불가 등급과 파격적인 수위로 인해 상영 초기 우려도 있었으나, 누적 관객 수 400만 명 이상을 기록하며 흥행에도 성공했다. 비평적 반응도 압도적으로 긍정적이었으며, 박찬욱 감독의 연출 철학이 ‘극단적이지만 우아한’ 경지를 다시 한 번 증명한 작품으로 남았다. 〈아가씨〉는 사랑의 이야기인 동시에, 권력에서 벗어나는 이야기다. 그리고 여성들이 서로를 이해하고 선택하며 탈출하는 그 과정은, 수많은 억압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하나의 은유적 희망으로 읽힌다. 예술성과 메시지, 서사와 이미지가 유기적으로 결합된 이 영화는 그 자체로 하나의 선언이었다.